기록이 부족한 한국 전통문화 디테일

한국 전통문화 장승 속 무언의 신호체계

diary3858 2025. 7. 6. 12:00

한국 전통문화 장승의 의미

한국의 전통 마을을 상상할 때 떠오르는 상징물 중 하나는 단연 장승이다.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이 수호신은 마을 입구나 길목에 서서, 마치 조용한 파수꾼처럼 마을을 지켜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승을 단지 '재앙을 막고 복을 부르는 토속 신앙물' 정도로 인식하지만, 정작 그 얼굴 표정에 담긴 상징성과 목적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장승의 얼굴은 대부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과장되었으며, 때로는 다소 무섭거나 익살스럽다. 그런데 왜 굳이 무섭고 거칠게 새겨야 했을까? 이는 단지 미적 요소가 아니라, 고대 한국인의 주술적 상상력과 집단의식을 반영한 무언의 경계 장치였다.

특히 조선 후기 민속기록이나 구전 민담에 따르면, 장승의 얼굴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 언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사람들은 장승의 무서운 눈매와 크게 벌어진 입, 송곳니 같은 치아를 통해 외부의 악귀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비언어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마을 외부에서 접근하는 모든 존재는 장승의 표정을 통해 자신이 환영받는 존재인지, 아니면 경계의 대상인지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장승은 마을 공동체의 ‘무언의 수호자’였으며, 얼굴 표정은 그 방어 체계의 핵심 기능을 수행했다.

 

한국 전통문화 장승 표정의 유형

기록에 남아 있는 전국의 전통 장승들을 살펴보면, 표정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무서운 얼굴, 둘째는 위엄 있는 얼굴, 셋째는 익살스러운 얼굴이다. 각각은 마을의 성격과 당시 주민들의 사회적 불안, 또는 민속적 필요에 따라 조형되었다. 예를 들어, 외부 침입이 잦았던 마을에서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빨이 날카로운 무서운 장승이 세워졌고, 외딴 지역이나 산간 마을에서는 위엄 있고 장중한 표정을 가진 장승이 선호되었다. 반면 마을 안에 이미 당집이나 서낭당 같은 신령적 장치가 많고 장승이 상징적으로만 쓰일 경우에는 익살스러운 얼굴을 지닌 장승이 등장하기도 했다.

무서운 얼굴을 가진 장승은 보통 이목구비가 매우 과장되어 있으며, 눈은 위로 치켜뜨고 입은 크고 벌어져 있다. 이는 외부의 귀신, 병, 나쁜 운명을 겁주고 물리치기 위한 전통 주술적 표현이다. 마치 귀신보다 더한 얼굴을 가진 장승이 악한 존재를 압도하는 구조이다. 위엄 있는 장승은 눈을 반쯤 감고 입을 굳게 다문 형태가 많은데, 이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는 ‘법의 수호자’와 같은 이미지로 이해되었다. 마치 자연의 원칙과 질서 속에 엄숙하게 서 있는 존재처럼 조각된 것이다.

익살스러운 장승은 이마에 주름이 많고, 코가 뭉툭하며, 입꼬리가 웃고 있다. 이 유형의 장승은 주로 마을 안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며, 장승제가 열릴 때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함께하는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표정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마을의 정서, 필요, 그리고 시대의 감정이 투영된 민속 조형 언어였던 셈이다.

 

한국 전통문화 장승 표정에 숨겨진 민속적 상징

장승은 말하지 않지만, 그 얼굴 표정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보여주는’ 존재다. 사람들은 장승을 마주할 때, 말없이 그것의 표정을 통해 마을의 상태를 느꼈다. 어떤 마을에서는 장승의 눈매가 흐려지거나 입이 마모되면, 그 마을에 병이 돌거나 가축이 죽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장승의 표정은 정기적으로 보수되었고, 마을 공동체가 해마다 장승제(또는 장승고사)를 지내며 표정을 다시 새기거나 칠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장승의 눈은 사람과 귀신을 모두 바라보는 ‘경계의 시선’이었고, 입은 말 대신 ‘마음을 보여주는 창구’였다. 고요하게 선 장승은 말하지 않지만, 그 입 모양과 이빨 표현을 통해 마치 “이곳은 너의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또한 얼굴 주위에 새겨지는 문양이나 주름은 노인의 얼굴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장승이 단순한 목재가 아니라 조상 또는 자연신의 형상을 담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역할도 했다.

장승의 표정은 단순한 민속 장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경계’를 시각적으로 만들어낸 상징체계였다. 이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공간과 안전, 공동체의 규칙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즉, 장승의 얼굴은 마을 전체의 무의식이 조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보다는 이미지에 의존하던 사회 속에서, 장승의 무표정하거나 강렬한 인상은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현대의 장승과 표정의 재해석

오늘날 장승은 관광지나 민속촌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전통적 조형물’로 인식되지만, 그 표정의 의미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장승은 웃고 있거나 귀여운 캐릭터처럼 조형되며, 그 원래의 목적이었던 경계와 주술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장승의 표정은 다시 해석될 수 있다. 마을이 전하고 싶어 하는 감정, 혹은 방문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로써의 장승은 여전히 유효하다. 표정은 시대를 넘어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 장승의 표정을 복원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공동체 정신 회복 차원에서 ‘무서운 장승’이나 ‘위엄 있는 장승’을 다시 세우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민속 유산 복원을 넘어서, 공동체가 스스로의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장승의 얼굴은 마치 마을의 자화상과도 같고, 그 눈빛과 입매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소망, 두려움, 바람이 담겨 있다.

장승은 말없이 서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표정 하나하나에 담긴 민속적 지혜와 무언의 메시지는, 오늘날 디지털 언어와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사람과 공간, 신령과 감정 사이를 이어주던 장승의 얼굴 표정, 그것은 곧 한국 민속의 침묵 속 언어이자, 가장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